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람 하차투리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러시아 제국]] [[캅카스]] 부왕령 티플리스현 티플리스[* 現 [[조지아]] 수도 [[트빌리시]].]에서 태어났다. 하지만 [[조지아인]]은 아니었고 가족 모두가 [[아르메니아인]] 가계였다.[* 트빌리시는 원래 동부 아나톨리아 반도처럼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.] 어릴 적부터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민속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, 제본공 아버지인 예기아(Եղիա, 러시아어로 [[일리야]]) 하차투리안이 벌어오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라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은 받지 못했다. 그래도 학창 시절 [[취주악]] [[동아리]]에서 테너호른([[미국식 영어]]로는 알토호른)을 독학으로 익혀 연주하는 등 어느 정도 음악 활동은 했다. 1921년에는 [[모스크바]]의 제2예술극장에서 무대 감독으로 일하던 형 수렌(Սուրեն) 하차투리안을 찾아갔는데, 형 수렌은 [[생물학]]을 전공하려던 하차투리안에게 비록 교육은 제대로 못받았지만 음악에 소질은 있으니 음악원에 입학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. 하차투리안은 처음에는 가방끈도 짧고 해서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지만, 미하일 그네신이 세운 그네신 음악원에서 시험을 본 뒤 의외로 바로 합격했다. 처음에는 [[첼로]] 연주자를 지망해 세르게이 비치코프와 안드레이 보리샤크에게 배웠지만, 이후 원장인 미하일 그네신이 주관하는 작곡과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면서 여러 편의 [[실내악]]과 독주곡을 썼다. 1929년에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옮겨 [[니콜라이 먀스콥스키]]와 세르게이 바실렌코에게 각각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고, 1934년에 졸업 작품으로 첫 [[교향곡]]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. 1936년과 1940년에는 각각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과 바이올리니스트 [[다비드 오이스트라흐]]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호평을 받았고, [[독소전쟁]]이 한창이던 1941~42년에는 [[시베리아]]에서 피난하면서 자신의 최대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는 발레 '가야네'를 작곡해 대성공을 거두었다. 이 발레는 전쟁 중임에도 국내외에서 상당히 자주 상연되었고, 1943년에는 발레에서 발췌해 연주회용 관현악 모음곡도 세 곡이 나왔다. 이외에도 전쟁 분위기에 맞추어 [[소련군]]을 찬양하는 노래나 [[행진곡]] 같은 선전용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, 1943년에는 전쟁의 참화와 분노를 다룬 두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. 이 곡은 그 전에 발표된 [[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]]의 [[교향곡 제7번(쇼스타코비치)|교향곡 7번]]과 그 후에 발표된 [[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]]의 교향곡 5번 두 작품과 함께 전쟁 중 창작된 소련 교향곡들 중 걸출한 명작으로 선전되면서 국내외에서 자주 공연되었다. 이 무렵 하차투리안은 프로코피예프·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'''소련 음악의 세 거성'''으로 불리며 서방에서도 명성을 떨쳤다.[* '소련 3대 작곡가'라는 호칭은 [[세계 3대|마치 공신력 없는 일본 매체가 무작위로 붙인 듯한 느낌]]이 나지만, 1940년대의 유력한 서방 언론들이 이미 거론하며 즐겨 사용한 표현이었다(Three Titans of Soviet Music). 물론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과 생산성이 워낙 압도적인 만큼 하차투리안은 평가에 있어 그에 못 미치는 느낌이 나지만, 보통은 세 명을 꼽으라 할 때 [[카발레프스키]] 대신 하차투리안이 거론되는 편이다.]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[[안드레이 즈다노프]]가 주도한 음악계 [[숙청]]에 휘말렸는데, 1943년에 이미 소련 [[공산당]]에 입당한 상태였지만 당적을 갖고 있던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해 교향곡 3번을 비롯한 신작들이 모조리 형식주의 작품이라고 격하게 비난 당했다. 결국 하차투리안도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[[자아비판]]을 강요받았고, [[대숙청]] 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'명예회복'을 위해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를 다룬 [[영화]]의 [[OST]] 같은 체제 순응 성향의 작품을 쓰거나 모교인 그네신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강사로 일하면서 지냈다. 하지만 [[이오시프 스탈린]]의 사후 찾아온 해빙기에 다시 복권되었고,[* 에둘러 자신의 입장을 암시한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음악적 해빙을 촉진시켰다.] 1956년에는 가야네에 이어 두 번째 발레 대작 '[[스파르타쿠스]]'를 발표했다. 이 발레도 마찬가지로 소련 발레 중에는 지금도 생명력을 얻고 있는 명작으로 손꼽히며, 마찬가지로 연주회용 모음곡 세 곡으로 정리되기도 했다. 1950년대 초반 부터는 작곡가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는 지휘자로도 연주회에 자주 출연했고, [[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]]나 [[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, [[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]] 같은 서방 악단과도 공연하고 [[음반]]을 만들었다. 1961년부터 1968년 까지는 자신이 협주곡을 이미 남긴 [[피아노]]와 [[바이올린]], 첼로를 위한 단악장의 협주 작품들인 협주 광시곡들을 하나씩 더 작곡했고, 생애 후반기였던 1970년대 중반에는 [[현악기]]들을 위한 무반주 독주곡들을 남겼다. 1978년에 75회 생일을 약 한 달 남겨두고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고, 유해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[[예레반]]에 묻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